멘탈체 [멘탈체] 20.데바찬: 원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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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우주나무 댓글 0건 조회 10,260회 작성일 16-07-31 23:38본문
제 20 장
데바찬: 원리들
아스트럴계에서 보내어지는 사후의 삶의 첫 부분은 이미《아스트럴체The Astral Body》에서 충분히 설명되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아스트럴체를 아스트럴계에 남겨두고, 사람이 자신의 의식을 멘탈체 속으로 끌어올려 즉 자신이 멘탈계로 “상승”하여, 이른바 천계(天界, heaven world)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우리의 연구를 시작한다. 이것은 신지학자들에 의하여, 문자 그대로 빛나는 나라Shining Land를 의미하는 데바찬Devachan이라는 용어로 일반적으로 불린다; 그것은 또한 산스크리트어로는 데바스단Devasthân 즉 신들의 나라Land of the Gods라고 불린다. 그것은 힌두인의 스바르가Svarga이며 불교도의 수카바티Sukhâvati이고 조로아스터교도와 기독교도 그리고 이슬람교도의 천국天國Heaven이다. 그것은 또한 “보통 사람들의 니르바나”라 불려왔다. 데바찬의 기본 원리는 데바찬이 상념想念의 세계라는 것이다.
데바찬에 있는 사람은 데바차니devachanî로 묘사된다.
고대의 책들에서, 데바찬은 인간의 진화를 감독하는 위대한 영적이고 지성적인 존재들(spiritual Intelligences, 理智靈)의 작용에 의하여 모든 슬픔과 악이 배제되는 멘탈계 중 특별히 보호받는 한 지역으로 묘사된다. 그것은 인간이 그의 물질계에서의 삶의 결실들을 평화적으로 동화시키는 지극히 복된 안식처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데바찬은 멘탈계의 예비된reserved 지역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곧 살펴보겠지만, 각 사람이 자기 자신의 보호막shell 안에 자신을 가두어버려서, 멘탈계의 삶에 전혀 참여하지 않는 곳이다; 아스트럴계에서처럼, 그는 자유롭게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사람들과 교제할 수가 없다.
소위 데바찬의 인위적인 보호를 거기에 있는 각 개인을 둘러싸는 만(灣, gulf)으로 여기는 또 하나의 (표현)법은, 물론 카마적 질료 즉 아스트럴 질료 전부가 파도에 쓸려나가 버리듯이 사라지고 거기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하위 세계들에 있는 어떤 것에도 반응할 수 있는 수단(vehicle, 體) 즉 의사소통의 매체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실제적으로는 이러한 하위 세계들은 결과적으로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스트럴체로부터 멘탈체를 최종적으로 분리시키는 것은 전혀 고통을 수반하지 않는다; 사실상, 보통 사람이 그 (분리의) 본질을 깨닫는 것은 어쨌든 불가능하다; (그러한 순간에) 그는 단순히 그 자신이 즐거운 휴식 속으로 평온하게 빠져드는 것을 느낄 뿐이다.
그러나, 육체의 죽음 뒤에 나타나는 것과 유사한, 멍한 무의식 기간이 존재한다; 그 기간은 폭넓은 범위 안에서 다양할 수 있으며, 그 사람은 거기서 서서히 깨어난다.
이 무의식의 기간은, 출생 전의 육체적인 삶(胎兒)에 해당하며 데바찬에서의 삶을 위하여 데바찬의 자아ego를 형성하는 데 필요한, 잉태기간인 것 같다. 그 기간의 일부분은, 미래를 위하여 앞으로 가져가야 할 모든 것(아스트럴 질료)을 아스트럴계의 영원한 원자로써 흡수함에 의해서 생기는 것 같고, 또다른 일부분은 다가오는 (멘탈체의) 개개의 독립된 삶을 위하여 멘탈체의 질료에 생기를 불어넣는 데 사용되는 것 같다.
두 번째 죽음 후에 사람이 다시 깨어날 때, 그의 첫 번째 감각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극한 축복감과 활력감, 즉 지복至福의 기쁨을 느껴서 그는 현재 단지 살아있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한 지극한 축복은 그 체계의 모든 상위계에 있어서 삶의 본질이다. 심지어 아스트럴계의 삶조차도 우리가 물질계에서의 삶에서 알 수 있는 어떤 것보다 훨씬 더 행복하게 살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천계의 삶heaven-life은 그 축복에 있어서 아스트럴계의 삶에 비할 바가 못된다(천계의 삶이 훨씬 더 축복으로 가득차 있다). 각각의 상위의 계에 있어서, 똑같은 경험이 되풀이되는데, 각각은 하위의 계에서 겪는 경험을 훨씬 능가한다. 이것은 축복감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또한 지혜와 시야의 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천계의 삶은 아스트럴계의 삶보다 훨씬 더 충만하고 폭이 넓어서, 그들 사이의 어떠한 비교도 불가능하다.
잠자는 사람이 데바찬에서 눈을 뜨게 됨에 따라, 아주 정묘한 색조色調가 열리는 그의 눈에 들어오고, 바로 그 공기가 음악과 색채인 것 같고, 전 존재가 빛과 조화로 충만하다. 그 다음에 황금색의 아지랑이를 통하여, 하위세계의 곤란한 일들과 정욕에 손상되지 않은 채 가장 고상하고 가장 사랑스러운 감정들을 표현하는 아름다움으로 영묘화靈妙化된, 자신이 지상에서 사랑한 사람들의 얼굴들이 나타난다. 아마 어떠한 사람도, 깨어나서 천계로 들어가는 (순간의) 지극한 축복을 적절하게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 천계에서의 삶의 주된 특징이다. 그것은 악惡과 슬픔이 그 세계에서는 본질상 불가능하거나 모든 피조물이 거기서 행복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존재가 거기에 존재한다는 바로 그 사실로부터 자기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적인 축복을 향유하고 있는 세계, 다시 말해서 그의 열망에 대해서 반응하는 (상위의) 권능은 자신이 열망하는 능력(의 정도)에 의해서만 제한 받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주적 기쁨이 압도적으로 존재한다는 느낌은 데바찬에 있는 사람의 마음에서 결코 떠나지 않는다; 지상에 있는 어떤 것도 그와 같지 않으며, 아무것도 그것을 모방할 수 없다; 천계의 이 엄청난 영적인 활력spiritual vitality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천계를 묘사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들이 행해졌지만, 천계가 본질적으로 물질계의 언어로 묘사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실패하게 된다. 이리하여 불교와 힌두교 투시가들은 보석으로 된 열매들jewelled fruits을 가진 황금과 은으로 이루어진 나무들에 관하여 말한다; 거대하고 웅장한 도시에서 살았기 때문에, 유대의 서기관書記官은 금과 은으로 이루어진 거리들에 관해 말했다; 더욱 현대적인 신지학 저술가들은 일몰日沒의 색깔들과 바다 및 하늘의 영광스러운 풍경들로부터 자신들의 비유들similes을 끌어낸다. 각자가 똑같이, 자기 마음에 익숙한 그러한 직유법적인 비유들을 사용함으로써, 너무나 웅대하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리를 (생생하게) 묘사하려고 노력한다.
멘탈계에 있어서 사람이 겪는 상황position은 아스트럴계에서(의 상황과는) 크게 다르다. 아스트럴계에서는, 수면 중에 습관적으로 사용했었기 때문에, 자기에게 철저히 익숙한 (아스트럴)체를 그는 사용했었다. 그러나, 이전에는 멘탈체를 그가 결코 사용한 적이 없었으므로, 멘탈체는 결코 충분히 발달되어 있지는 않다. 이리하여, 멘탈체는 그로 하여금 그 주변의 세계를 볼 수 있도록 하는 대신에 그 세계로부터 그를 상당히 차단시키게 된다.
아스트럴계에서 그가 (본성을) 정화시키는 삶을 사는 동안에, 그의 본성의 하위 부분은 불타 없어진다; 지금은 보다 고상하고 보다 세련된 상념들 즉 그가 지상에 사는 동안에 (마음에) 품었던 고상하고 이기심없는 열망들만이 그에게 남아있다.
아스트럴계에서는, 비록 분명히 제한적일지라도, 그는 비교적 즐거운 삶을 살면서도, 다른 한편에는 그 속죄贖罪의 삶에서 상당히 고통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데바찬에서는, 전적으로 이기심이 전혀 없는 그러한 상념들과 감정들만의 결과들을 거두어들인다; 그러므로 데바찬의 삶은 지극한 축복이 될 수밖에 없다.
한 매스터가 말한 바와 같이, 데바찬은 “눈물이 없고 한숨이 없는 나라(land)이며 결혼하는 것도 결혼에 종속되어지는 것도 없는 나라이며 정의로운 자들이 그들의 충만한 완전성을 온전히 깨닫는 곳이다.”
데바차니devachanî 주위로 밀집한 상념들은, 일종의 껍질을 이룬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그는 이 정묘精妙한 질료로 어떤 유형들의 진동에 반응할 수 있다. 이러한 상념들은, 그가 천계의 무한無限한 부를 끌어들이는 (매체로서 이종의) 능력들이다. 그 상념들은 그가 천계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내다 볼 수 있고 또한 외부의 힘들로부터 반응이 그에게 올 수 있는 (통로인) 창문들로서 역할을 한다.
가장 원시적인 상태를 벗어난 모든 사람은, 그의 전 일생 중 단 한번일지라도, 순수하고 사심없는 감정을 조금이라도 가졌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그에게 하나의 창문이 될 것이다.
이러한 상념의 껍질을 하나의 한계로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상념의 껍질의 역할은 사람을 멘탈계의 진동들로부터 차단시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인식 능력의 한계 내에 있는 그러한 (멘탈계의 진동에 대한) 영향들에 반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멘탈계는 (우리가 제 27장에서 살펴보겠지만) 신성한 마음Divine Mind의 하나의 반영 즉 무한히 큰 하나의 창고이다. 거기서부터 천계의 삶을 향유하는사람이, 물질계 및 아스트럴계의 삶 동안에 발생한 자신들의 상념들과 열망들의 힘에 정비례해서 그 결과들을 이끌어낼 수 있다.
보다 상위의 천계에서는, 이러한 한계들이―만약 우리가 그것들을 당장은 한계라고 부를 수 있다면―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상위의 계에 대하여는 우리가 이 책에서 다루지 않는다.
각 사람은 천계의 삶에 접근하여, 사전事前의 노력으로 자신이 (받을) 준비를 한 만큼만 천계에 관하여 인식할 수 있다. 동양의 비유가 말하는 바와 같이, 각 사람은 자기 자신의 그릇을 가지고 온다; 어떤 그릇은 크고 어떤 그릇은 작다. 그러나, 크든지 작든지 간에, 모든 그릇은 (채울 수 있는 만큼) 가득 채워진다; 지극한 축복의 대양大洋은 모든 그릇을 채우고도 남는다.
일반인은 이 멘탈계에서 결코 크게 활동할 수가 없다; 그의 상태는 주로 수용적이고, 그 자신의 상념막 외부에 있는 어떠한 것에 대한 그의 시각vision은 가장 제한된 성격을 띤다. 그의 상념들과 그의 열망들이 단지 어떤 경향들lines을 따라서만 있기 때문에, 그는 갑작스럽게 새로운 경향들을 형성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는 주위의 많은 살아 있는 힘들 혹은 멘탈계의 힘있는 천사로서 알려진 주민들angelic inhabitants로부터 거의 이득을 얻을 수 없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비록 이러한 존재들 중 다수가 사람의 어떤 열망들에 쉽게 반응을 할지라도.
이리하여 지상에서의 삶 동안에 주로 물질적인 것들에만 주의注意해온 사람은, 자신이 (홀연히) 소속된 세계와 접촉할 수 있는 창문을 별로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흥미가 예술이나 음악이나 철학에 있었던 사람은, 측량할 수 없는 기쁨과 무한한 가르침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런데 그가 이득을 볼 수 있는 정도는, 단지 그 자신의 지각능력에만 달려있다.
오로지 (일생동안 품고 있던) 고상한 상념들이 애정愛情과 헌신獻身에 연관된 상념들을 가진 사람들이 대단히 많다. 타인을 깊이 사랑하거나 어떤 인격적인 신(神, a personal deity)에 대하여 헌신을 강하게 느끼는 사람은, 친구나 신에 대한 강한 멘탈적인 이미지를 만들게되고, 그와 더불어 그 멘탈 이미지를 필연적으로 멘탈계 안으로 가지고 오게 된다. 왜냐하면 그 멘탈적인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소속되는 것은 바로 그 이미지에 맞는 멘탈적인 질료의 계에 속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의 중요하고 흥미로운 결과가 뒤따른다. 그 이미지를 형성하고 유지시키는 역할을 하는 사랑은 매우 강력한 힘이다. 사실상 상위 멘탈계에 존재하는 친구의 자아에 도달하여 작용할 정도로 충분히 강한 힘이다. 왜냐하면 사랑을 받은 진정한 사람은, 물론, 그를 아주 부분적으로 표현하는 육체가 아니라 자아ego이기 때문이다. 그 진동을 느끼는 친구의 자아는, 즉시 그리고 열심히 그 진동에 반응하며 자신을 위하여 만들어진 상념형태 속으로 자신을 쏟아 넣는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친구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실제적으로vividly 그와 함께 있게 된다.
그 친구가 (육체적인 죽음을 기준으로 해서 말하는) 소위 살아 있든지 아니면 죽었든 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것은 육체 속에 때때로 갇히는 친구의 일부분(단편)이 아니라, 자신만의 진정한 계에 있는 그 사람 자체(의 영혼)에 대하여 호소하기 때문이다. 자아는 항상 반응한다; 그리하여 백 명의 친구를 가진 사람은 그들 각각의 애정에 대하여 동시적으로 그리고 충분히 반응할 수 있는데, 이는 하위 계에서 아무리 많은 표현을 하더라도 (그것을 수용하는) 자아의 무한함은 다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무한히 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하늘들”에서 자기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
이리하여 천계의 삶을 사는 각 사람은, 그가 교제하기를 바라는 모든 친구들에 대한 활성화된vivified 상념형태들을 자신의 주위에 가지고 있게 된다. 더군다나, 그 상념형태들은 그에게 있어서는 항상 최고의 상태에 있는데, 이는 자기자신이 진정한 계(상위 멘탈계)에 있는 친구들의 자아가 현현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매체인 상념형태들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멘탈체25편
제한된 물질계에서, 우리는 우리의 친구를 우리가 물질계에서 알고 있는 제한된 현현으로만 생각하는 데 익숙하다. 한편, 천계에서 우리는 이제까지 지상에 있었을 때 보다 우리의 친구들의 실재에 훨씬 더 가까이 다가간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가 있는 이 물질계는 자아 자신의 집에 더 가까운 (그 집에서) 두개의 단계나 또는 계보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후 멘탈계에서의 삶과 아스트럴계에서의 삶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하나 있다. 아스트럴계에서 우리는 (친구들의 신체가 잠들어 있는 동안에) 그들의 아스트럴체로 친구들을 만난다; 즉, 우리는 여전히 그들의 인성들personalities을 만나고 있다. 그러나, 한편 멘탈계에서는 우리는 그들이 지상에서 사용하는 멘탈체들로서 친구들을 만나지는 않는다. 반대로, 그들의 자아는 자신들을 위하여 전혀 새로운 별도의 멘탈체들을 형성하여, 인성들의 의식이 아니라 자아들의 의식이 이 멘탈체들을 통하여 작용한다. 이리하여 우리의 친구가 행하는 멘탈계의 활동들은 그들의 물질계의 삶들의 인성들이 행하는 활동들과는 모든 점에서 전적으로 별개가 된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사람의 인성人性에는 닥칠 수도 있는 어떠한 슬픔이나 곤란(장애)은, 그의 자아가 또 하나의 멘탈체로 사용하고 있는 그의 상념형태thought-form에 전혀 영향을 미칠 수가 없다. 만일 그러한 일이 일어날 때 그가 인성의 슬픔이나 곤란에 대하여 실제로 알지라도, 그것은 그에게 곤란한 것이 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원인체에 있는 에고의 관점으로 보아, 그것을 배워야 할 하나의 교훈이나 해결되어야 할 어떤 카르마로 간주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견해에서 볼 때, 어떠한 현혹(미혹)도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현혹된 견해란 다름 아닌 하위 인성의 견해이다; 왜냐하면 인성이 곤란한 것(장애)들이나 슬픔들로 보는 것은 원인체에 있는 진인眞人에게는 상향적인 진화의 도상에서 (나아갈) 단계들일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데바찬에 있는 사람은 물질계에 있는 친구들의 인성적인 삶들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한 소위 메커니즘적인 이유를 이미 충분히 설명했다. 이러한 결론에 대한, 마찬가지로 설득력 있는, 다른 이유들이 또한 존재한다. 왜냐하면 데바찬에 있는 사람이 (물질계로) 되돌아보고 그가 사랑했던 사람이 슬픔이나 고통 중에 있거나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을 본다면 그가 행복하게 되는 것은 명백히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데바찬에서는 공간이나 시간으로 인한 분리는 이리하여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단어나 상념에 대한 어떠한 오해도 발생할 수 없다. 반대로, 지상에서의 삶의 경우보다 영혼과 영혼끼리 훨씬 더 긴밀한 교제가 존재한다. 멘탈계에서는 영혼과 영혼 사이에 어떠한 장벽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속에 있는 영혼의 삶의 실재에 정확히 비례하여, 데바찬에서 영혼의 교제가 존재한다. 우리 친구의 영혼은, 그의 영혼과 우리의 영혼이 동조된 진동으로 떨릴 수 있는 바로 그 정도로, 우리가 창조한 그에 대한 형상으로서 살아 있다.
우리는 지상에 있을 때 유대관계가 단지 육체와 아스트럴체적이었던 사람들과는 접촉할 수 없다. 즉 그들과 우리가 내적인 삶에서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면, 그들과 접촉할 수 없다. 그러므로, 데바찬에서는 어떠한 적도 들어올 수 없다. 왜냐하면 단지 마음과 가슴이 동조(진동)하는 조화만이 천계에서는 사람들을 함께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보다 훨씬 진화한 사람들과는, 우리가 그들에게 반응할 수 있는 한도에서만 접촉한다. 우리보다 덜 진화된 사람들과는, 그들의 능력의 한계에 따라 우리가 교제할 수 있다.
신비학도는 욕망 엘리멘탈이 사후에 가장 조밀한 질료를 바깥에 두면서 동심원적인 질료의 층들로 아스트럴체를 재배열하여, 그의 아스트럴체의 제일 바깥 층의 질료가 소속되는 아스트럴계의 하부계에 그 사람을 국한시킨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멘탈계에서는 이에 상응相應하는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멘탈 엘리멘탈은 욕망 엘리멘탈에 의해서 채택된 방식으로는 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아스트럴계의 삶과 멘탈계의 삶 사이에 또 하나의 중요한 차이가 있다. 멘탈계에서 사람은 다양한 계level들을 차례로 경험하지 않고, 자기의 발달정도에 가장 잘 상응하는 계에 직접적으로 끌려간다. 그 계에서 그는 멘탈체로 살아가는 그의 삶을 전부 보낸다. 그 삶의 종류는 무한한데, 이는 각 사람이 독자적으로 자신의 삶을 만들기 때문이다.
데바찬 즉 천계에서, (지상에서의 삶이) 막 끝난 사고자(思考者, the Thinker)의도덕적 및 멘탈적 경험들에서 귀중한 모든 것이 드러나고, 명상되어지고, 점차로 명확한 도덕적 및 멘탈적 능력으로 즉 그가 다음에 화신Incarnation할 때 그와 더불어 가지고 갈 능력들로 변형된다. 그는 과거의 실제적인 기억을 멘탈체 속에 담아두지 못한다. 왜냐하면 멘탈체는, 우리가 나중에 당연히 살펴보겠지만, 해체될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기억은, 과거를 통해 살아 왔고 (지금도) 살아가는 바로 사고자思考者의 내부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나 과거에 경험한 여러 사실들은 능력으로 변하게 된다. 그리하여 만일 사람이 (무엇인가를) 깊이 연구해 왔다면 그 연구의 결과로 (그가) 연구(한 내용이) 그에게 첫 번째로 제시될 때 그 주제를 습득하고 통달하는 특별한 능력을 창조하게 될 것이다. 그는 그러한 연구 방향에 대하여 특별한 소질을 가지고 태어나서 아주 용이하게 그것을 소화할 것이다.
지상에서 생각되어지는 모든 것이 이렇게 데바찬에서는 활용된다; 모든 열망은 능력으로 완성된다; 좌절로 끝난 모든 노력들은 재능과 능력들이 된다; 투쟁들과 패배들은 승리의 도구들로 차차 변형될 재료들로 다시 나타난다; 지혜롭고 잘 통제된 의지들로 완성될 슬픔과 잘못들은 귀금속들처럼 찬란한 빛을 발한다. 성취하는 데 필요한 능력과 기술이 과거에는 부족했던 선행을 베풀고자 하는 계획들은, 데바찬에서 상념으로 성취되는데 말하자면 단계적으로 실행된다. 그리고 이에 필요한 힘과 기술은, 지상에서 나중의 삶에 사용되어질 마음의 재능들로서 발달하게 된다.
데바찬에서는, 한 매스터가 말한바와 같이, 자아는 “모든 지상의 인성으로부터 도덕적 자질(특성)들과 의식의 넥타(정수, 감로)만을” 모은다.
데바찬 기간 중에 자아는 경험의 축적 즉 막 마친 지상에서의 삶의 수확을 검토하여, 그 경험들을 나누고 분류하여 동화시킬 수 있는 것을 동화시키고 무력해지고 쓸모 없는 것을 거부한다. 자아가 지상의 삶의 소용돌이에 항상 바쁘지만 않는 것은, 노동자가 항상 재료를 모으기만 하지 않고 때때로 그들로부터 상품을 만들어 내는 것과 똑같다. 혹은, 사람이 항상 음식을 먹기만 하지 않고 신체조직을 형성하기 위하여 음식을 소화하여 동화시키는 것과 같다. 이리하여 데바찬은, 우리가 나중에 보겠지만, 아주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일의 계획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데바찬의 속성(본질)에 대한 불완전한 이해로 인하여, 때때로 사람들은 하위의 천계에 있는 일반 사람의 삶은 단지 하나의 꿈과 환영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가족과 친구들 가운데서 행복하다고 상상하거나 기쁨이 충만하고 성공적으로 그의 계획을 실행하고 있다고 상상할 때, 그는 사실 지독한 착각의 희생자일 뿐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가 알 수 있는 한) 실재를 구성하는 것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견해로부터 기인한다. 신비학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육체 속에서 살 때에조차도 그들의 멘탈 삶에 대하여 거의 깨닫지 못하여, 그들이 육체 밖에서 멘탈적인 삶에 대한 모습이 제시될 때 그들은 모든 현실감을 잃어버리고 그들이 마치 꿈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느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사실은 물질계의 삶은, 비록 적합하지는 않지만 실재한다는 점에 관해서는, 멘탈계에서의 삶과 비교가 된다.
일반적인 지상에서의 삶 중에, 자기의 주위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일반 사람의 개념은 아주 많은 점에서 불완전하고 부정확하다는 것이 분명하다. 예를 들면, 그는 자기가 보는 모든 것의 이면에 놓여 있어, 사실상 단연코 모든 것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형성하는 에텔적, 아스트럴적 및 멘탈적인 힘들에 관하여 아무것도 모른다. 그의 전 시야는, 그의 감각들과 지성과 교육과 경험으로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러한 적은 부분의 대상에 제한되어 있다. 이리하여 그는 거의 대개 자기 자신이 직접 창조한 (관념의) 세계에 살고 있다. 그는 이것이 그러하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기가 더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이러한 관점에서, 일반적인 물질계의 삶은 적어도 데바찬에서의 삶만큼 환영적이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생각을 하면 물질계의 삶이 실제로는 훨씬 더 환영적이다는 것을 보여 줄 것이다.
왜냐하면, 데바찬에 있는 사람이 그의 상념들을 실제적인 것들로 생각할 때, 그는 완전히 옳다; 그 상념들은 멘탈계에서는 실제적인 것들인데, 이는 멘탈계에서는 상념만이 실제적인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차이란 멘탈계에서는 우리가 본성으로 이 위대한 사실을 깨닫지만, 반면에 물질계에서는 우리가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멘탈계와 물질계) 둘 중에서 환영이 물질계에서 더 크다고 당연히 말할 수가 있다. 사실, 멘탈적 삶은 감각들로 이루어진 물질계의 삶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생생하며 실재에 더 가깝다.
그러므로 한 매스터의 말에 의하면, “우리는 사후의 삶을 유일한 실재로 부르고, 인성자체를 포함한, 지상에서의 삶을 단지 환영적이라고 부른다.” “데바찬의 존재를 전통적인(관습적인) 용어가 뜻하는 의미와는 다른 어떠한 다른 뜻으로 ‘하나의 꿈’이라고 부르는 행위는 진리의 유일한 수호자인 비전적인 가르침Esoteric Doctrine에 대한 지식을 영원히 포기하는 것이다.”
지상에서의 삶에 대해서 현실감(실재감)을 느끼고 우리가 데바찬에 관하여 이야기를 들을 때 비현실감을 느끼는 하나의 이유는, 우리가 지상에서는 삶의 환영들에 완전히 좌우되어 내부로부터 지상의 삶을 보는 반면에, 우리가 (데바챤을 듣는) 그 순간운 그 데바챤의 삶이 지닌 특별한 정도의 마야나 환영을 겪지 않은 상태에서 단지 외부(물질계)로부터 데바찬을 응시(관조)하기 때문이다.
데바찬 자체에서는, 그 과정은 역전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 주민들은 그들 자신의 삶이 실제적인 삶으로 느끼고 지상에서의 삶은 가장 명백한 환영들과 오해들로 가득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대체로, 데바찬에 있는 사람들이 지상의 삶을 영위하는 물질계의 비평가들보다 진리에 더 가깝다. 그러나 물론 지상의 환영들은 줄어들지라도, 하위의 천계들에서의 접촉은 더욱 실제적이고 더욱 직접적이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전적으로 (환영들을) 피할 수는 없다.
보다 일반적 용어로 말하면, 사실은 우리가 존재의 계들을 통하여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우리는 실재에 더 가까이 접근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적인 것들이 상대적으로 실제적이고 지속적이지만, 물질적인 것들은 환영적이고 순간적이기 때문이다.
신비학도는 이러한 생각을 따르는 것이 도움이 되고, 데바찬에서의 삶을 물질계와 아스트럴계에서 더 일찍이 보내어진 삶의 자연스럽고 피할 수 없는 결과로 간주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품고 있는 최고의 이상들과 열망들은 물질계에선 결코 실현되지 않으며, 또한 물질계에서 실현될 가능성들이 적고 물질계의 질료가 비교적 조잡하기 때문에 물질계에서는 실현될 수도 없다.
그러나 카르마의 법칙 (또 다른 표현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라고 알려져 있다)에 의하면, 어떠한 힘도 결코 상실되거나 그 (힘에 의해 나타나는) 당연한 결과가 없어 질 수가 없다; 그 힘은 당연하고 충분한 결과를 필연적으로 초래한다. 그리고 기회가 올 때까지, 그것은 그 (기간) 만큼 축적된 에너지로서 남아 있다. 달리 말하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고차원적인 영적인 에너지의 많은 부분은 지상의 삶에서는 당연한 결과를 가져올 수가 없다. 왜냐하면 (육체보다) 고차원적인 그의 본질들은 사람이 육체의 압박(속박)incubus으로부터 벗어날 때까지는 아주 섬세하고 정묘한 진동들에 반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천계의 삶에서 처음으로, 이 모든 장애는 제거되고, 축적된 에너지가 카르마의 법칙이 요구하는 필연적인 반응으로 쏟아져 나온다. “지상에서는 단절된 부분적인 호들, 천계에서는 하나의 완벽한 원”이라고 브라우닝은 말한다. 그러므로, 완벽한 정의가 행해지고, 비록 물질계에서는 많은 것이 목표를 벗어나고 아무 쓸모가 없는 것 같을 지라도 아무것도 결코 상실되지는 않는다.
이리하여, 데바찬은 하나의 꿈이나 목적없이 게으름피우는 도원경桃源境lotus-land이 결코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그곳은 지성과 감성이 조잡한 질료나 사소한 염려들에 의하여 방해를 받지 않고 발달하고, 지상에서의 삶의 투쟁들을 위하여 무기들이 연단(주조)되는 곳으로서 사실상 미래의 진보가 확보되는 나라, 오히려 하나의 존재 상태이다.
신비학도는 또한, 사후의 삶을 계획해 온 자연의 체계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최대한도로 행복하도록 하는 그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체계라는 것을 지각할 수 있을 것이다. 천계의 즐거움이 (어떤 정통주의 이론들에 따르는 것처럼) 단지 하나의 특별한 유형에만 속한다면, 어떤 사람들은 천계에 지루함을 느끼고, 어떤 사람들은 그 (천계의) 특별한 성향에 대한 취향의 부족하거나 필요한 교육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 곳에 참여할 수 없을 것이다.《선장 스톰필드의 천국 방문》에서, 마크 트웨인은 천계에 대한 진부한 개념으로 (사람이 생각하기에) 그곳에 영원히 거주할 수 없다는 것과 같은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을 하여, 우연히도 심오한 종교 및 철학 문제들에까지도 유머스러운 분석을 적용한 전형적인 예를 제공한다.
우리의 본 주제로 돌아가서, 친척들과 친구들에 대한 어떤 다른 결론arrangement이 마찬가지로 만족스러울 수가 있을까? 만일 죽은 사람들이 지상에 있는 친구들의 우여곡절의 운명을 (눈으로) 뒤따르도록 허용 받는다면, 행복은 그들에게 불가능할 것이다. 만일 자기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서 그들이 친구들을 만나기 전에 친구들이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면, 고통스러운 공백 기간이 있을 것이다. 그 기간은 종종 수년으로 연장되지만, 많은 경우에는 친구들이 아주 변한 상태로 도착하여 더이상 서로 마음이 통하지 않을 것이다.
자연은 이 모든 어려움들을 피하여 왔다. 각 사람은 지상에서의 삶 중에 그 자신이 직접 만든 원인들에 의하여, 천계에서의 삶의 길이와 특성 둘 다를 독자적으로 결정한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특성들idiosyncrasies에 가장 적합한 기쁨의―자신이 당연히 받을―양과 질을 정확하게 가질 수밖에 없다. 그에게는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언제까지나 함께 있으며, 항상 그들은 최고로 고상한 상태와 최고로 좋은 상태로 그와 더불어 있다; 어떠한 불협화음이나 변화라도 그들 사이에 전혀 들어 올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항상 그들로부터 정확히 그대로 받기 때문이다. 사실상, 자연의 방법은 인간의 재치나 상상으로 지금까지 대체할 수 있게 (고안한) 어떤 것보다도 극히 탁월하다.
아마도 물질계에서는, 멘탈체를 입고 있으며 물질적인 체physical vehicle에 속박되지 않은 사고자思考者에 의해 행사되는 능력들의 창조적인 속성을 깨닫는 것은 어렵다. 지상에서, 예술가는 탁월하게 아름다운 광경들을 창조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가 지상의 재료들로 그것들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할 때 그는 그것들이 그의 멘탈적 개념들에 훨씬 못 미친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데바찬에서는 사람이 생각하는 모든 것이, 마음이 정욕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정상적으로 작용하는 매체이며 모든 멘탈적인 자극에 반응하는 매체인, 마음을 형성하는 질료Mind-stuff 그 자체의 대단히 정묘한 질료로부터 (원하는) 형태로 즉시 재현된다. 이리하여 데바찬에서는 사람의 주위에 있는 환경의 아름다움은, 그의 마음의 풍성함과 에너지에 따라 무한히 증대된다.
신비학도는 멘탈계가, 물질계에 화신하는 사이의 중간 기간들에서뿐만 아니라 (바로) 지금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생생한 삶이 영위되는 광대하고 찬란한 세계라는 것을 깨닫고자 애써야만 한다. 우리로 하여금 최고의 천계의 모든 영광이 지금 여기 (바로) 우리 주위에 있다는 것과 그 세계로부터 흘러나오는 영향력들이 우리가 단지 그것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언제까지나 우리에게 작용한다는 것을 충분하게 깨닫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바로 단지 우리의 영적인 발달의 부족 즉 육체에 의해 강요되는 제한들 때문이다. 불교의 스승이 말씀하신 바와 같다: “네가 너의 눈으로부터 안대眼帶를 벗어 던지고 보기만 하면, 네 주위 모든 곳에 빛이 있다. 그것은 아주 놀랍고, 아주 아름다우며, 어떠한 사람이 꿈을 꿔왔거나 기도한 것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며, 그것은 영원 무궁토록 존재한다.”(한 민족의 영혼 p.163)
달리 말하면, 데바찬은 의식의 한 상태이며, 그의 영혼을 감각들로부터 철수시키는 것을 배운 사람에 의해서는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다.
우리는, 데바찬이 각 지상에서의 삶에 대한 관계는 니르바나가 윤회가 완성된 주기에 대한 관계와 같다고 생각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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